The story of Acoustics -- R. Bruce Lindsay(Brown University)

 

          The Journal of Acoustical Society of America,

                                                             Vol.39, No 4, 629-644, April 1966

          Translated by Dajaehun

 

 음향과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가장 초기에 기록된 현상과 이론부터 현재(1966년) 상황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개관하였다. 특히 18, 19세기의 소리의 발생, 전파, 지각에 대한 수학적이고 실험적인 발전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현대 음향학에 영향을 준 Rayleigh의 업적도 고려했으며, 최근의 연구는 간단히 다루었다. 그리고 원전을 충실하게 인용하고자 노력했다.

 

 

   INTRODUCTION

 

  비록 과학의 역사가 오랫동안 전문역사가들에 의해 무시당해 왔지만, 지금은 이런 불행한 상황이, 문명의 발전에 과학의 발달이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교정되고 있다. 따라서 전문역사가들이 이런 학문의 연구에 관련하여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과학사에 대한 지식이 실천 과학자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관계없이 실제로 제기되는 상황이며, 양측에 논쟁이 있어 왔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증거는 자체적으로 이 문제의 긍정적인 견해에 찬성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주어진 과학 분야에 기본이 되는 개념의 진화에 대한 지식(과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종종 현재의 경험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을 제시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전제를 마음에 품고, 다음의 음향학 역사에 대한 간단한 개관을 제시한다.

 

  우리는 과학의 체계에서 어떤 변칙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음향학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청력은 분명히 인간 감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며, 우리가 소리의 세계에서 살면서 초기부터 일반적으로 관찰해 온 것이지만, 이 주제에 대한 인간의 아이디어 발달에 대한 집중적인 역사적 연구는 비교적 최근까지 소홀하게 대해져 왔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한 좋은 제안이 몇 년 전에 있었다.[79] 그것은 소리의 기원, 전파 및 수신에 대해 받아들여진 근본 아이디어가 인간 사고의 발달 초기 단계에서 이미 제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음원은 물체의 일부의 운동이라고 확신했고 공기를 통하여 변환된 잘 알 수 없는 운동이며, 이 운동은 귀 근처에서 청각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애매한 것이기는 하지만 원시적인 빛이나 열에 대한 이론이 없던 시절에 커다란 물체의 고대 운동개념 보다도 더 수용 가능한 소리이론이었던 것이다. 물리학의 최종 분야는 현대적 관점의 이론을 수립하기까지 수많은 계속적인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나 음향학의 모든 분야는 수학적인 분석과 새로운 현상에 대한 적용에 의해서 기본 개념의 변경과 수정이 필요했다. 특히 이론적인 측면은 음향학 역사에서 볼 때, 전체적으로 수리역학의 일부로 포함되어진 경향이 있다.

 

  이러한 그럴듯한 관점은 우선적으로 고집스러운 현대 물리학자들의 관점 즉, 음향물리학의 핵심은 이미 오래 전에 완성 됐으므로 더 이상 물리학적 주제에 속하기 보다는 오히려 전기전자공학이나 심리학의 한 분과로 보는 관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는 주장보다도 사실은 더 왜곡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기본 개념이 일찍이 형성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각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논고에서 음향적인 실용성과 동시에 잘 정의된 음향이론을 포함하는 역학과 다른 물리학 분야의 생생한 역사를 상세히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을 반박하고자 한다.

 

  음향학의 문제는 편의상 세 개의 주된 그룹으로 즉, (1) 소리의 발생, (2) 소리의 전파, (3) 소리의 지각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다음의 역사적 윤곽은 매우 유기적이다.

 

 

   I. PRODUCTION OF SOUND

 

  고체를 때릴 때 소리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관측되어졌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기초 음악적인 장단 맞춘 즐거운 소리를 인지하고, 다시 어떤 흥겨운 상황에서는 인간의 입이나 적절한 모양의 튜브를 이용하여 소리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수 천 년 동안 예술로 간주 되었지만, 기록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수 천 년 전에 이미 과학적인 방법으로 음악의 본성이 조사되어졌다. 음악의 근본을 연구한 그리스의 철학자는 피타고라스(Pythagoras)로서 기원전 6세기에 남부 이태리의 크로톤(Crotone)에 학교를 세웠다. 그는 양끝이 고정된 두 개의 팽팽한 현을 튕겼을 때, 짧은 현에서 높은 음정의 소리가 나고, 특히 현의 길이비가 2배 일 경우, 짧은 현에서 한 옥타브 높은 음정의 소리가 발생하는 사실에 크게 인상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참조_국악 음계이론(http://soryro.tistory.com/98)). 이 이야기는 전설적이다[10]. 피타고라스와 그 추종자들의 경험적인 사실의 이해에 대한 기초로서의 정수 개념과 함께 인용되는 이야기이다. 음정이 어느 정도 소리를 발생하는 물체의 진동 주파수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기원전 375년경에 활약했던 남 이태리 타렌툼의 아르키타스(Archytas)와 같은 피타고라스학파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움튼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관점에 대해서 공정한 진술은 기원 후 6세기의 로마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의 음악에 대한 글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과학과 관련한 내용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에서 볼 수 있다. 위대한 이탈리아 과학자의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1638년 출간)의 ‘첫째 날’의 끝에서 물체의 진동[27]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토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진 단진자의 등시성(갈릴레오는 진자의 주기가 진폭의 크기에 관계없이 진폭에 무관하다는,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될 만한,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했다)과 진동 주파수가 진자의 줄 길이에 의존하는 것, 한 물체의 진동이 다른 떨어져 있는 물체에 유사한 진동을 발생시킨다는 공진과 공명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음정과 진동하는 현의 길이의 관련성에 대하여 상식적인 개념을 고려하고 있으며 단위 시간당 진동수 즉, 현재 주파수라고 부르는 양이 물리적 의미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2가지의 관찰 사실로부터 진동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말한다. 하나는 받침 있는 유리잔의 받침을 큰 그릇의 바닥에 고정하고 물을 유리잔의 테두리 부분까지 채운 후에 유리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유리잔이 진동하면서 소리가 발생한다. 동시에, 물 표면을 가로질러 진행하는 잔물결이 관측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유리잔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음정이 한 옥타브 높아지는데, 이 때 잔물결은 둘로 갈라진다. 이는 오늘날 파장이 반으로 줄었다는 현상을 의미한다. 두 번째 관측은 황동 판의 얼룩을 지우려고 철로 된 끌로 문지르던 중에 우연한 결과로 관측되었다. 황동 판을 문지를 때, 가끔씩 명확한 음악적 특성을 갖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동반되었다. 이런 경우에 그는 황동 판에 등 간격으로 미세한 줄이 나란하게 발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더 주의해서 관측한 결과, 문지르는 속도를 빠르게 하면 휘파람 음정도 증가하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그런 경우, 나란한 줄 간격이 줄어드는 것을 관측했다.

 

  갈릴레오는 황동 판의 문지름으로 발생하는 소리를 이용해서 스피넷(spinet)의 음정을 튜닝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스피넷 스트링의 두 개의 발생음의 음정이 5번째 음정(G음정)임을 청각으로 확인한 후, 각 각의 스피넷 스트링 발생 음 음정에 대응하는 황동 판의 두 문지름 소리의 발생 시에 잔물결의 간격이 3:2가 되는 사실을 발견했다. 갈릴레오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당겨진 줄의 주파수가 길이, 장력, 밀도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식은 의심할 바 없이 선배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줄의 진동과 진자의 진동을 비교함으로써 옥타브 안에서 간단한 정수비인 어떤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어떤 소리는 불협화음이 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갈릴레오는 길이가 다른 진자를 중심축이 같게 놓고 전면에서 관측(오로지 갈릴레오의 눈으로 관측)할 때 즐거운 패턴은 주파수가 공통성을 갖고 있으며 반면에 복잡하고 난잡한 진동은 불협화음이 된다고 보았다. 이는 위대한 천재적인 운동학적 관측이며 그럴듯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과학의 역사도 역사가들에게 상당한 정도를 의존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음향학에 대한 성취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트뤠스델(Clifford Truesdell[70])은 그가 심혈을 기울인 탄성역학의 역사에서 진동역학에 대한 갈릴레오의 기여가 중요하다는 과장된 견해를 표하고 있다. 그는 갈릴레오의 유명한 책에 나오는 일반역학에 관한 많은 자료는 갈릴레오가 분명히 처음 생각한 17세기 초부터 일관되게 다루어지던 것이지만, 대부분의 진동에 대한 결론은 '대화'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갈릴레오가 그토록 매력적으로 표현한 기본 아이디어로 몇 몇 연구자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인 비이크만(Issac Beekman: 1588-1637)은 현의 진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70, p.24]를 1618년 초에 발표 하였다. 여기서 그는 음정과 주파수 사이의 관련성을 자신 있게 피력했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물리학 연구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비이크만 보다도 더 일찍 음정에 대해 연구한 이탈리아인 베네디트(Giovanni Battista Benedetti: 1530-1590)는 투린(Turin)에서 1585년에 발행한 책에서 소리의 음정 비와 소리를 발생시킨 물체의 진동 주파수 비는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인 신부인 마린 메르센느(Marin Mersenne: 1588-1590)의 연구에 대해 살펴보자. 메르센느는 1625년에 당겨진 현의 진동에 대한 실험적인 관측 결과를 책으로 발간했다. 여기서 그는 현의 진동 주파수는 현의 길이에 반비례하고 단면적의 근에 비례한다고 인정했다. 트뤠스델은 메르센느의 현 진동의 중요한 결론이 갈릴레오로부터 예상된다고 생각했다[49, 50].

 

  물리학에서 널리 알려진 탄성의 법칙을 밝힌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와 같은 나중의 실험학자들은 진동 주파수와 음높이를 오늘날 상식적인 강의[30, p.57]에 등장하는 골판지 가장자리를 부딪치는 톱니바퀴 실험으로 연결 지으려고 노력했다.

 

  진동주파수와 음높이 음정의 관계를 가장 철저히 연구한 사람은 프랑스인 조셉 사비에르(Joseph Sauveur: 1653-1716)이다. 그는 소리과학을 Acoustics(음향학=音響學)으로 구별할 것을 최초로 제안했다[64]. 이 용어가 'hearing‘이란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왔음은 잘 알려져 있다. 비록 현대 음향학은 실제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넘어 넓게 확장되기는 했지만 확실히 적절한 용어이다. 사비에르는 두 오르간 파이프나 그와 유사한 음원에서 관측되는 음정이 약간 다른 두 소리의 맥놀이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리고 맥놀이를 청각으로 반음정 즉, 15/16 주파수 비를 갖도록 보정된 두 파이프의 기본 주파수를 계산하는데 이용했다. 실험에 의해 그는 반음정 주파수 비를 갖는 두 파이프에서 동시에 소리가 나면 맥놀이 수는 1초에 6개임을 알아냈다. 이 맥놀이 수가 두 파이프에서 발생한 소리의 주파수 차이라고 다룸으로써 사비에르는 두 주파수가 90, 96 cps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사비에르는 1700년에 당겨진 현으로 실험한 사실을 중심점의 처진 정도를 측정하는 다소 모호한 방법으로 주파수를 계산했다.

 

  이는 영국의 수학자 브룩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에 의해 계승되었다. 테일러는 무한급수의 테일러 정리[68]로 알려진 수학자로써 진동하는 현의 동력학적인 해를 처음으로 제공했다. 이는 1713년에 발간된 것으로 근래에 기본진동 모드(즉, 현의 모든 부분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로 진동할 때 현의 진동 모양이 곡선이라고 가정한 것에 기초한다. 현의 곡선은 현의 모든 점이 평형 위치로 복귀하는 시간은 같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 커브 방정식과 뉴턴 운동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메르센느와 갈릴레오의 실험결과와 잘 일치하는 기본진동의 주파수에 관한 공식을 유도할 수 있었다. 트뤠스텔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를 눈여겨보면 특별히 흥미로운데 즉, 뉴턴의 운동방정식 F=ma를 연속매질의 질량요소에 적용한 최초의 예로 보여 진다.

 

  비록 테일러는 특별한 경우만을 다루고 편미분 계산문제 때문에 현의 다른 모드들에 대해 적용할 수 없었지만 스위스인 다니엘 베르누이(Daniel Bernoulli:1700-1782)[2](18세기에 특별한 업적을 낸 8명의 과학자를 배출한 가족의 일원), 프랑스인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16], 스위스인 레온하르드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70] 등이 수학적 접근을 위한 길을 닦았다. 이들은 현 진동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만들고 그 해를 구했다. 일반적으로 역학의 진전에 비해 소리과학이 뒤처진 이유로 제시되는 적절한 수학적 도구의 결핍이 어떤 것인가를 반추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불행히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유동미분이나 라이프니츠(Baron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의 미분법이 연속 매질의 운동을 다루기에는 아주 적절하지 못했다.

 

  소리의 음원으로써 현의 진동 문제의 물리적 측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프랑스인 사비에르[64]와 동시에 영국의 존 월리스(John Wallis: 1616-1703)[77]도 당겨진 현이 진동할 때 중간 부분에 진동하지 않는 점 즉, 사비에르가 마디(nodes)이라고 부른 점과 크게 움직이는 위치 즉, 사비에르가 배(loops)라고 부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는 곧바로 마디가 없는 단순(기본)진동 보다 고주파수에 대응하는 진동임을 알아 차렸고, 고주파수는 단순진동 주파수의 정수배임을 알았다. 이 진동에 관련한 발생 음을 사비에르는 조화음(harmonic tones)이라고 부르고 단순진동에 대응하는 음을 기본음(fundamental)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700년경에 붙여진 표기법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사비에르는 더하여 현의 여러 조화진동에 대응하여 동시에 조화음을 발생시킨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대한 동력학적 설명은 베를린 왕립아카데미 학회지에 실린 베르누이의 논문[2]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베르누이는 현의 진동이란 서로 독립적인 단순 진동이 동시에 함께 나타나는 것이며 어느 순간의 어느 한 점의 변위는 모든 단순 진동의 변위의 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처럼 중첩의 원리를 인용하여 작은 진동의 공존의 원리를 제안하고 있다. 베르누이는 이를 증명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대한 그의 이해력에 비하여 수학은 그렇게 대단하지 못했다. 중첩의 원리의 실제 중요성은 거의 동시적으로 오일러[25]에 의해 지적됐다. 즉, 이상적인 마찰 없는 현의 운동을 지배하는 미분방정식이 선형적임을 보였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중첩의 원리는 정리로서 입증되었다.

 

  18세기 중반에서 1785년까지의 진동 현에 대한 전체 역사는 베르누이, 오일러, 달랑베르 같은 천재적인 연구자들에 의해 각 자가 정기간행물에 열성적으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업적에 너무 심각했으며, 불행히도 서로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를 거친 언사로 비방했다. 연속매질의 운동을 묘사할 다시 말해, 음향학의 정확한 과학적 기초를 다지기 위한 수학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출현이 쉽지는 않았다. 원문에 대하여 불쾌한 주석을 다는가하면 당시의 위대한 과학자까지도 심각한 실수를 하고 동시에 서로 서로의 서신과 글을 평하였다. 어떤 임의함수의 표현 가능성 즉, 중첩의 원리가 내포하고 있는, 진동하는 현의 초기 모양을 사인이나 코사인의 무한급수 항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18세기 중반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는 1822년 푸리에(J. B. J. Fourier: 1768-1830)[26]가 음향학 발전에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그의 기념비적 정리를, 열의 분석 이론에 채용하고 있다.

 

  18세기 수학자들 중에서 진동현의 문제에 매달린 사람은 이탈리아 튜린 출신이면서 평생을 프랑스에서 보낸 라그랑주(J. L. Lagrange:1736-1813)이다. 그는 역학분석(Mecanique analytique)[41]을 쓴 사람으로서 이 논문에서 역학은 수학적 분석의 한 부류로 환원되며, 서문에서는 그림은 필요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론 물리학을 공부한 독자는 일반화 좌표와 라그랑주 방정식을 떠올릴 것이다. 1759년에 튜린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42]에서 라그랑주가 주장한 현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특이하고 기발했다. 그는 당겨진 현을 같은 길이 당 질량이 균일한 입자가 배열된 것으로 가정했으며 무게는 무시했다. 그는 그러고는 많은 자유도를 갖는 동력학적인 시스템으로 현의 문제를 풀어서 입자수와 같은 수의 독립적인 진동 주파수가 존재함을 보였다. 그는 입자수를 무한하게 놓되 각 각의 입자 질량을 작게(전체 입자의 질량이 현의 유한한 질량과 같도록 설정) 놓고 극한을 취함으로써 이들 진동 주파수들이 정확히 연속적인 현의 조화진동 주파수가 됨을 보여 주었다. 라그랑주는 연속적인 현 진동에 관련된 분석적인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확실한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몇 가지 주목할 사실들이 있다. 첫째는 이미 오일러[21]가 1744년에 정수개의 입자가 있는 현의 운동에 대한 역학적인 문제를 풀었으나 극한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는 트뤠스델에 의해서 지적된 것으로 라그랑주의 극한은 수학적인 결함이 있으며 좀 더 엄격하게 하기위해서는 그가 싫어했던 현 진동에 대한 동시대의 베르누이, 오일러, 달랑베르 등의 수학적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용할 것을 필요로 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라그랑주의 방법은 레일리 경(J.W. Strutt Lord Rayleigh:1842-1919)에 의해 소리의 이론(Theory of Sound[67])에 채택되었고, 최근의 역학과 음향학 교과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라그랑주의 방법이 진동 현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업적의 중요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과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다양성에 장점이 있으며 이는 과학에서 중요하다. 다양성이야 말로 동일한 현상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이고 그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트뤠스델은 사실 음향학과 역학에 대한 라그랑주의 기여가 일반적으로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달랑베르는 현재 우리가 파동방정식[16]이라고 부르는 진동 현에 대한 편미분방정식을 1747년에 최초로 유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또한 현을 따라 양쪽으로 진행하는 파동 형태를 나타내는 일반해를 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현의 진동은 양쪽으로 진행하는 파동의 조합으로 생기는 소위 정상파 또는 정지파로 해석되었다.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모든 것의 의미와 타당성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사이의 현대적인 이론의 발전단계의 논쟁과도 같았다.

 

  진동현의 중요성만 다루었다고 18세기의 학자들이 모두 현의 진동에만 매달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음 발생 운동에 대하여도 똑같이 흥미를 느꼈다. 예를 들어, 1759년도 논문에서 라그랑주는 파이프 오르간에서 발생하는 소리와 일반적인 관악기 음악을 다루었다. 기본적인 실험적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라그랑주는 열린 개관 파이프와 닫힌 폐관 파이프의 근사적인 조화 진동 주파수를 이론적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경계조건이 논쟁 거리였는데 오늘날도 그대로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문제는 소리의 전파에 오히려 더 영향을 미치고, 전파문제에서 조금 더 다루어진다. 최근에 와서 비로소 크게 인정받은 이 분야에 대한 오일러의 대단한 공적을 주목해 보자. 오일러가 약관 시절인 1727년 바젤(Basel)에서 쓴 ‘소리에 대한 물리적 논문’이란 작은 논문에서, 파이프 배음 구조의 본질적인 양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적인 형식이다. 이 논문도 물론 라그랑주의 연구보다 더 오래전에 이루어졌고 당시에 오일러는 플루트와 같은 악기에 관심이 많았다. 1759년 무렵에 튜브내의 기주진동과 그들 사이의 여러 관련성들이 오일러와 라그랑주에 의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1766년 무렵에 오일러가 공들여서 작성한 유체역학에 대한 논문의 제4절[24]을 전부, 튜브내의 음파에 할애하고 있다. 위대한 역학적 정신력을 가진 이 시대의 수학자들이 이와 같이 문제에 매달리고 해결하여 구축하는 엄청난 열정을 오늘날의 우리가 평가하기는 좀 어렵다. 이 시대를 수리물리학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18세기의 수리과학자들은 물론, 현 옆에 놓인 다른 고체가 진동하며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종과 같이 친숙한 종류의 음원에 대한 방대한 경험적 자료들이 당시에 축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 절에서 기술한 수학적인 방법을 금속 막대, 금속 평판, 그리고 둥근 금속판에 성공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고체에 가해지는 변형력과 변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다행히도 로버트 후크[32]가 일찍이 이 문제에 매달려 단순한 형태로 해결했다. 후크는 1660년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1675년에 [CEIIILOSSSTTUV법 수수께끼 형식으로] 발표하였는데 그는 물체가 탄성 변형할 때 스트레스(stress:단위면적당 작용하는 힘)와 스트레인(strain:단위길이 당 변형량) 사이의 관계를 라틴어로 ‘ut tencio sic vis(인장력에 관하여)’로 발표했다. 여기서 소위 탄성한계 내에서 탄성체의 변형 스트레인(즉, 직선 막대나 금속 띠의 작은 길이 증가)은 직접적으로 스트레스(즉, 막대나 금속 띠의 당겨진 방향으로의 단면적에 단위면적당 작용하는 힘)에 비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법칙은 소리를 발생하는 탄성진동을 포함한 모든 수학적 탄성이론의 기본이 된다. 다양하게 지지하고 꽉 조인 금속 띠의 진동에 대한 이 법칙의 적용은 1734-1735년 사이에 오일러와 다니엘 베르누이[70, p165]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수학적 방법은 나중에 레일리경이 소리의 이론[67]에서 체계화하고 확장하였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변형된 금속 띠의 변형에너지를 소위 변분법을 적용하여 잘 알려진 공간상의 4차 미분방정식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금속 탄성판의 진동에 대한 분석적 해의 검산은 어려워서 비록 18세기 말에 독일의 과학자 클라디니(E. F. F. Chladni: 1756-1824)에 의해 유용한 실험적 데이터 정보가 많이 축적되었음에도 상당히 늦게 진행되었다. 클라드니는 1787년에 기념논문 ‘Entdeckungen über die Theorie des Klanges'[8]에서, 진동하는 금속판에 모래를 뿌려서 마디선 즉, 진폭이 0인 선을 보여주는 그의 실험 방법을 기술하였다. 이들 클라드니 무늬는 대단히 아름다운 것으로 오랫동안 인정되었다. 그들은 진동 현에 마디 점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한 일반적인 방법으로 설명 할 수 있었다. 1802년에 클라드니의 고전적인 연구[7]인 ’Die Akustik'가 발간된 후 몇 년 동안까지도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폴레옹 황제가 금속판의 진동에 대한 만족할 만한 수학적 이론의 발견에 3000프랑의 현상금을 프랑스학회에 제공했다. 이 상은 1815년에 정확한 4차 방정식을 유도한 여성 수학자인 소피 제르맹(Marie-Sophie Germain)이 수여하였다. 그녀는 경계조건을 채택하여 해를 구하였으나 결과는 올바르지 못했다. 이 문제는 키르히호프(G. R. Kirchhoff: 1824-1887)[36]가 좀 더 정밀한 이론을 제시하는 1850년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비행기 동체와 같은 물체들의 진동에 관련한 현대 기술은 다양한 모양의 평판이나 고체 껍질(shell)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드럼의 소리 발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유연한 막의 진동 문제에 처음 기여한 사람은, 비록 원형 막의 진동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보통은 프랑스인 포아송(S.D. Poisson: 1781-1840)[58]으로 보고 있다. 원형 막의 문제는 1862년 클렙시(R. F .A. Clebsch: 1833-1872)[9]가 해결했다.

 

  그러나 막에 대한 최초 기여자가 포아송이라는 관점은 70년 전에 오일러[22]의 중요한 업적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트뤠스델[70]은 지적하고 있다. 오일러는 사각형과 원형 막에 대한 정확한 편미분 방정식을 유도하였으나 경계조건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켜 진동 양상(normal modes)에 대한 (인자 2에 의해서) 올바른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포아송은 겉보기에 오일러의 이 논문을 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각형의 막에 대한 정확한 진동 모드를 구했다. 이러한 일들은 스스로 수학자라고하는 사람들이 19세기 동안에 수행한 진동문제에 대한 많은 이론적인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시대의 많은 수학적인 응용이 이런 종류의 물리적 문제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자연스러운 점이지만, 경계조건이 언제나 실제 실험적으로 구현된 상황을 반영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한 점이기도하다. 임의의 넓은 주파수영역을 갖고 임의의 크기와 모양인 물체를 진동시키는 능력은 20세기에 주로 연구[33]된 전기음향학이 발전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전기진동과 진동전기회로가 발견되고 발명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지만 전기적으로 기계적인 진동을 일으키기 위한 전기와 역학의 연결 방법은 1900년 이후에 실용적인 사용이 있기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음원에 대한 실용적인 주파수표준용 음차가 살아남았으나 실용적인 경우에 대한 음향학의 기대할 만한 수학적 이론의 실질적인 적용은 큰 진척이 없었다. 실용적 목적의 기초물리적인 원리는 19세기에 사실 잘 알려져 있었다. 자기장 내에서 전류가 흐르는 도체가 받는 힘 같은 것은 1820년대에 발견되었다. 압전효과(piezoelectric effect)는 1880년에 퀴리(Curie)형제[14,15]에 의해 발견되었다. 압전효과는 몇 몇 결정(특히, 수정)에서 나타나는 성질로 다양한 방법의 역학적인 스트레스를 가할 때 표면에 전하가 나타나는 현상이며, 역으로 결정을 전기장에 놓으면 스트레인이 나타나서 변형이 일어난다. 음파에 대한 음원과 수신기로의 활용성이 일찍이 인지되었으나 1920년대까지 실질적인 이용이 되지 못했다. 자기변형(magnetostriction) 효과 즉, 자화 가능한 물체를 자기장내에 놓을 때 스트레인 변형하는 효과로서 압전효과와 같은 이용효과가 있다. 자기변형 효과는 1842년에 주울(J. P. Joule: 1818-1892)[60]이 발견하였다. 진공관 진동기와 증폭기의 출현과 이들 효과의 조합으로 소리의 모든 주파수와 세기를 정밀하게 발생하고 수신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리 발생 이야기의 나머지는 주로 전기음향의 발전에 관한 것으로 레일리경과 그 후계자들의 기여는 나중에 뒤에서 간단히 논하며 다루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소리의 발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인간의 말에 관련된 성대와 하등동물에 의해 발생되는 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예가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음 발생의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음향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않은 사실은 이상하다. 아마도 인간의 말이 소리의 발생에 원리적으로 접근하는 수학과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말이 그들 자신의 육체와 연관된 소리라는 사실 때문에 관심 부족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말은 언어에 가깝기 때문에 언어나 어원학자들의 분야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인간 말의 근본 구조 즉, 진동하는 성대와 구강의 조화는 주로 해부학자와 생리학자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여하튼 1629년에 영국인 바빙톤(W. Babington)이 입안에 거울을 넣어서 빛을 반사시키는 방법으로 성대의 운동을 관찰하였다. 이것이 후두경 개발의 시작이 되었으며 체코 생리학자인 체르막(J. N. Czermac)이 1857에 완벽하게 완성시켰다. 대략 80년 정도 후에 Bell 전화연구소의 팬스워스(D. W. Farnsworth)가 성대의 동영상을 만들었다.

말과 노래의 모음 특성은 1860년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가 그의 이름이 붙여진 유명한 공명기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철저히 연구되었다. 그 결과는 1872년에 반간된 논문[75] ‘Die lehre von den Tonempfindungen als physiologische Grundlage für die Theorie der Musik(음악 이론을 위한 생리적 기초로서의 소리 감각에 대한 가르침)'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음향학의 위대한 걸작중의 하나이다. 이는 나중에 귀에 의한 소리의 지각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일찍이 1837년에 영국인 휘트스톤(Sir Charles Wheatstone: 1802-1875)이 모음 소리에 대한 조화이론을 이끌어 낸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성대는 기본 주파수와 여러 조화음으로 진동한다. 공기를 통한 대화시 성대 진동은 구강 공명으로 강화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와 다른 이론이 처음으로는 영국인 윌리스(W. T. Willis)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는 모음의 근원인 성대가 계속적으로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훅 부는 공기 덩어리들이 방출되는 것으로 가정하고 일시적인 공기덩어리들이 구강 안에서 진동과 공명을 함으로써 특성 있는 소리를 방출한다고 보았다. 나중에 헬름홀츠는 두 아이디어가 정확한 요소라고 지적했고, 현대의 연구에서도 이런 견해를 확증했다. 초기에 몇 몇 연구자들은 구강이 단일 공명기로 보았고 반면에 다른 연구자들, 특히 전화기 발명자인 벨(Alexander Graham Bell)이나 헬름홀츠[75,55] 자신은 모음은 두 개의 고유 공명 즉, 서로 결합된 두 개의 공명기로서 입의 이중공명에 의존한다고 여겼다. 헬름홀츠가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주파수에 맞추어 구강공간이 공명한다는 지식은, 비록 당시에는 이런 현상을 연구할 고도로 발전된 도구가 없었지만, 17 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II. PROPAGATION OF SOUND

 

  초기에 기록된 관찰결과를 보면, 소리는 공간의 한 점에서 공기의 어떤 활동으로 다른 점으로 전해지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일치를 보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공기의 실제 운동을 확실히 강조하고 있고, 그의 ‘De Anima'란 글에서 기술된 것을 볼 수 있으며, ’De Audibilibus'란 글은 그를 소리는 공기 중의 압축파[10, p288] 때문이라는 개념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영원히 과학의 역사를 괴롭히는 성가신 문제 즉, 통상적인 해석의 어려움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동료들이 소리가 전파할 때 소리의 전파방향으로 공기가 전체적인 흐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유명한 건축기술자인 비투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가 물표면의 물결파를 끌어들여 소리를 파동으로 이해한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소리가 전달될 때 공기는 확실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나중에 출현하는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비투비우스의 이러한 관점을 부인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비록, 갈릴레오가 살았던 시절의 프랑스인 가상디(Pierre Gassendi: 1592-1655)[48]는 그의 원자론의 부활에서 소리의 전파를 말하고 있는데, 소리는 음원에서 작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가 방출됨으로써 공기를 통해 움직여서 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궤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6)[74]는 바람이 불 때보다 고요할 경우에 소리가 더 잘 전달되는 것을 관찰한 후에, 소리가 공기의 운동에 의해 이동한다는 주장에 큰 의문을 표했다. 또한, 17세기 중반 경에 공기 펌프로 공기를 뺀 병에 종을 넣고 종을 울리는 실험을 한 후에 조용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진공에서의 종 실험을 처음 실시한 사람은 예수회 수사인 키쳐(Athanasius Kircher: 1602-1680)였다. 그는 1650년에 발간된 그의 책(Musurgia Universalis)에서 소리의 전달에 공기는 필요 없다는 실험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궤리케와 키쳐의 연구결과의 불일치는 용기의 벽을 통한 소리의 전달을 회피하지 못한 실패라기보다는 오히려 목표로 한 진공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1660년에 영국인 보일(Robert Boyle: 1627-1691)[5]은 더 개선된 공기펌프와 주의 깊은 실험을 반복한 결과 오늘날 잘 알려진 공기를 펌프로 뽑아낼수록 소리의 세기가 감소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아마도 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공기가 소리 전달의 매질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결론지었다. 사실상, 실험에 대한 설명은 전통에 의해 미화 되었지만 실수였다. 이 상황에 대한 좀 더 주의 깊은 조사는 소리 세기의 감소가 낮은 공기압력 즉, 진공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벨이나 다른 음원에서 공기 중으로 다시 공기에서 유리용기로 전달되는 소리를 벨에서 발생시키는 어려움이 증가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음원과 음원을 둘러싼 매질사이의 소위 임피던스 불일치는 매질 밀도의 감소에 따라 증가한다. 물론 실험은 음향전달에서 음원과 매질의 중요한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대의 소리에 대한 이론은 의심할 바 없이 음향전달에는 어떤 매질이 필요함을 내포하고 있다.

 

  공기가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킨다. 어떻게 그렇게 빠른 전달이 가능한가? 일찍이 1635년에 파리에 머물던 가상디[46]는 빛은 순간 이동한다는 가정 하에 화기를 이용하여 음속을 측정하였다. 그의 음속 측정값은 1473 Paris feet/sec, 프랑스 혁명까지는 소개되지 않았던 그래서 가상디가 사용하지 않았던 미터법으로는 478.4m/s 이었다. 어느 정도 나중에 메르센느(Mersenne)[46]가 좀 더 주의 깊게 측정한 결과, 가상디의 측정값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측정한 음속은 1380 Paris feet/sec 즉, 450m/s 이었다. 가상디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은 음속이 음정에 독립적이라는 사실로써, 높은음정의 소리가 낮은음정의 소리보다 더 빠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의심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가상디는 측정된 음속에 바람의 영향은 없다는 실수를 하였다. 1650년 이탈리아인 보렐리(G. A. Borelli: 1608-1679)와 그의 동료이며 플로렌스 아카데미 회원인 비비안니(V. Viviani: 1622-1703)는 같은 실험[51]을 실시하여 1077 Paris feet/sec 즉, 350m/sec의 음속을 측정했다. 이들 모든 측정들은 온도, 습도, 풍속에 대한 참조 부족으로 어려움을 격었다. 비록 영국인 더햄(W. Derham: 1657-1735)[18]은 18세기 초(1708년 발표)에 음속에 대한 광범위한 측정을 한 후에 음속은 바람을 제외한 환경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햄의 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은 이탈리아 볼로냐 사람인 비안코니(G. L. Bianconi: 1717-1781)[6.47]로서 그는 1740년에 공기의 온도가 올라가면 그에 따라 음속이 증가한다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현대적 감각으로 모든 정확성을 고려하여 최초로 야외 측정(바람 없는)이 이루어진 실험은 아마도 음원으로 대포를 사용한 1738년의 파리과학 아카데미의 지휘 아래 수행한 실험일 것이다. 0℃에서 현대 단위로 332m/sec가 측정되었다. 2세기 동안에 계속해서 주의 깊게 반복된 측정은 이 값과 1% 이내의 차이만을 보였다. 가장 최근(1942년)의 표준상태의 온도와 기압[28]에서 측정한 음속은 331.45+0.05m/sec이다. 이 측정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사실, 얼마 전의 대기 속의 소리의 속도에 대한 물리적 측정은 결국 시간의 측정인 것이다.

 

  고체 매질에서의 음속의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던 금속평판의 마디선을 연구한 클라드니이다. 그는 같은 방법으로 금속 막대의 소리전파를 연구하였고 음속을 마디선 간격을 측정하여 계산하였다. 1808년에 광학분야에서 유명한 프랑스 물리학자 비오(J. B. Biot: 1774-1862)[3]는 파리에 있는 철로 만든 수도관을 전파하는 소리의 시간을 직접 측정하여 실제 음속을 측정하였다. 수도관의 길이는 거의 1000m로 길었다. 그는 주어진 소리가 철 파이프를 통하여 전달하는 시간과 공기 중으로 전달되는 시간을 비교함으로써 고체 철관을 통하여 전파하는 압축파의 속도가 공기 중의 음속에 비해 몇 배나 더 빠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금속의 탄성이 공기에 비교하여 매우 크다는 사실에서 당연히 기대되던 결과였다. 비오의 실험결과는 클라드니의 계산결과와 잘 일치했다.

 

  물과 같은 액체에서의 음속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측정한 사람은 스위스 물리학자인 콜라던(Daniel Colladon: 1802-1893)으로서 수학자 스텀(Charles Sturm: 1803-1855)의 도움을 받아 1826년 제네바호수에서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콜라던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이 호수 물속에서의 소리의 속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1825년에 파리 과학아카데미에서는 1826년도 현상금의 주제로 주요한 액체의 압축률 측정을 발표했다. 콜라돈은 응모하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물과 몇 몇 액체의 정적 압축률을 성공적으로 측정하였다. 그는 압축률의 상대적으로 작은 값과 그 역수로 주어지는 큰 값의 체탄성계수에 다소 매료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물론 음속과 압축률의 이론적인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확한 압축율의 측정은 곧바로 음향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라는 착상을 하게 된 것이다. 측정은 1826년 11월에 제네바호수에서 행해졌고, 그 결과는 과학아카데미의 대상을 받은 유명한 ‘Memoire sur la compression des liquides et la vitesse du son dans l'eau'[12]에 기록했다. 음속으로부터 계산된 물의 압축률은 정지 상태에서 측정한 값과 아주 비슷했다. 콜라던과 스텀의 연구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콜라던의 전기[11]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 일을 한 사람으로서, 나중에 잘 알려진 물리학자겸 기술자로서 비공식적으로 그 일을 어떻게 했는지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는 섬광을 내기위한 화약을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을 가로질러 운반하다가 겪은 곤란한 일들을 꾸밈없이 밝히고 있다. 이 측정에서 구한 물속 소리의 평균속도는 8℃에서 1435m/sec 였다.

 

  비록 공기를 통한 소리의 전파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결의 운동과 비교되었지만 최초로 소리의 파동이론을 수학적 폼으로 심각하게 이론화를 시도한 사람은 분명히 영국인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53] 이다. 그는 그의 유명한 두 번째 책인 ‘principia mathematica'(정리 47-49)에서 펄스형태의 소리가, 진동물체에서 인접한 매질을 움직이고 다시 움직이는 매질은 인접한 매질을 움직이는 방식의 반복으로 전달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뉴턴은 계속해서 몇 가지 임의적인 가정을 말하고 있는데 원리적인 하나를 보면, 펄스가 유체 속을 전파할 때 유체입자는 항상 단순조화운동을 한다는, 그가 말 한대로 ‘진자 진동의 법칙에 따라서 (입자는) 항상 가속과 저지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단순조화운동에 대한 이 정리를, 만일 하나의 입자에 대하여 이 정리가 옳다면 인접한 모든 입자들에게도 옳다는 사실로 증명했다. 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항상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에 필요치 않다. 뉴턴의 최종 결과는 음속이 공기의 밀도에 대한 대기압 비의 제곱근과 같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뉴턴의 ‘유도(결론)’는 유럽 대륙의 자연철학자들인 오일러, 존 베르누이(다니엘 베르누이의 동생), 라그랑주의 비판에 시달렸다. 이미 앞에서 1727년의 오일러의 논문 ‘Physical Dissertation on sound(소리에 대한 물리적 연구보고)'[23]에 대해 언급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소리의 발생은 물론, 소리의 전파에 관한 명쾌한 물리적 원리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고, 완전히 전문화된 것으로 뉴턴의 방법 연구에 착수했다. 오일러는 그의 방법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하지만 그는 뉴턴의 방법과 유사한 공기 중의 음속에 대한 하나의 표현을 제시했다. 뒤늦게 1749년에 와서야 뉴턴의 이론을 매우 명확한 분석적 형태로 발전시키고, 뉴턴의 결과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액체 내에서의 음파에 대한 파동방정식의 유도와 해법이 구축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소리의 전파문제가 점차적으로 분명해졌다. 이는 달랑베르가 1747년에 연속적인 현의 방정식을 처음으로 유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에 달랑베르는 음파에 같은 방정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오일러처럼 상세한 연구로 진전시키지 못했다. 오일러는 이 경우에 고체와 액체에서의 파동은 서로 별개의 문제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18세기 학자들 서로 간에 편지를 통한 주장과 반대, 비평은 과학사학자들의 일을 매력적이면서도 어려운 것이 되도록 만들었다. 비록, 오일러[20]가 1759년에 베를린 아카데미에 제출한 3편의 훌륭한 논문에서 공기 중의 음파의 전파에 관한 이론의 기초를 다졌다고 보이기는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라그랑주도 튜린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에서 단순조화파동과 구별되는 임의 특성의 음파에 뉴턴의 추론과 일반화를 적용하고 있다. 실제로, 라그랑주도 공기 중의 음속에 관한 뉴턴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뉴턴의 천재성으로 보아도 되고 행운의 증거로 보아도 된다! 기체 내에서의 음속의 이론적인 계산문제는 유명한 물리학 역사의 하나의 장을 구성한다. 공기의 온도가 60℉(=16.25℃)에서 측정한 정확한 데이터를 음속에 관한 뉴턴의 식 c=√(p/ρ) (여기서 p는 기체압력이고, ρ는 밀도임)에 대입한 결과 945ft/sec(=288m/sec)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이 값이 앞에서 언급한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실험값보다 작기는 했지만 뉴턴은 처음에 자리수가 맞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어쨌든 점 점 더 정확하게 측정한 값이 이론값보다 크다는 사실에 확신이 들면서, 뉴턴은 분명히 걱정이 되었던지 뉴턴은 그의 ‘Principia mathematica’ 두 번째 판(1713)에서 그의 이론이 실험값[53]에 잘 일치하도록 수정했다. 그가 한 연구는 전혀 명확하지 못했으나 실제 공기 중의 불순물에 대한 어떤 보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히 느끼고 있었다. 이는 뉴턴 같은 큰 인물도 이런 문제와 씨름하면서 위대한 정신의 생각의 경계선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과학사의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속문제에 1816년, 라플라스(Pirre Simon Laplace: 1749-1827)가 관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라플라스는 뉴턴과 라그랑주의 결론은 공기의 압축률의 역수인 체적탄성률을 압력 그 자체로 보는 즉, 이는 공기입자의 탄성운동을 등온과정으로 가정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실수가 있었다고 보았다. 음파 전달과정이 빠른 입자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압축과 희박이 단열과정의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라플라스의 가정이 좀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압축된 부분이 압축 전에 희박했던 곳이지만 열을 방출하는 열교환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단열적 탄성은 등온 탄성보다 ϒ비(比)만큼 더 크다. 여기서 ϒ는 기체의 비열비로서 정적비열에 대한 정압비열의 비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뉴턴의 공식은 c=√(ϒp/ρ)로 바뀌며, 항상 ϒ>1이므로 새로 계산되는 값은 이 전의 계산 값보다 더 크게 계산될 것이므로 실험값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 기대되었다. 라플라스가 그의 이론을 제안한 1816년에는 기체의 두 가지 비열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으나 ϒ에 대한 상세한 값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실험학자 라로체(LaRoche)와 베라드(Berard)가 측정한 공기에 대한 ϒ=1.5 값을 이용하여 라플라스는 6℃에서 c=345.9m/sec를 구했다. 이 값은 6℃ 온도에서 당시에 인용되던 가장 정확한 실험값인 337.18m/sec와 비교 되었다. 라플라스는 이 둘이 잘 일치한다고 보았으며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이 문제로 되돌아와서 그의 유명한 ‘Mécanique célèste(1825)'[43]에서 음속에 대하여 하나의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그때까지 유명한 열 실험학자인 클레멘트(Clement)와 디조메스(Desormes)는 고전적인 실험을 실시하여 ϒ의 값(1819)을 1.35로 측정하여 6℃에서 음속이 332.9m/sec임을 이끌어냈다. 몇 년 후에는 좀 더 정확한 공기의 비열비를 1.40으로 측정함으로써 라플라스의 이론과 실험값이 완전히 일치함을 보였다. 이 이론은 확고하게 인정되어 지금은 다양한 기체에서의 정밀한 음속을 측정함으로써 여러 기체의 정확한 비열비 ϒ를 구하는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18세기 후반부나 19세기 초기 사분기 동안은 앞에서 주목했던 1747년에 달랑베르가 발견한 파동방정식(파동방정식이란 파동에 관련한 어떤 물리량의 시간에 대한 2차 도함수가 같은 물리량에 공간좌표에 대한 2차 도함수에 파동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아지는 식)의 다양한 일반해에 기초한 연속 매질에서의 파동에 대한 이론화에 관한 무수한 시도가 목격된다. 예를 들어, 물과 같은 액체 표면 파동에 대한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음향학에 관련한, 액체에서 음의 전파에 대한 파동방정식의 응용성의 확신을 높여주는 것과 같은 정도에서만 의미가 있다. 1800년도까지 양단의 경계문제에 속하는 튜브(管) 내 공기 중의 음 전파에 대한 방정식의 해는 잘 구해졌고, 예견되는 조화주파수(정상모드 또는 부분모드)를 실험으로 정확하게 확인하였다. 사실 여기에는 영문 모를 불일치가 있었는데 반세기 후에 ‘관구 보정’이 이해되고 나서 명확하게 해결되었다. 튜브 내의 소리에 대한 측정기법은 오랫동안 오히려 미숙한 상태에 머물렀는데, 1866년 쿤트(A. Kundt: 1839-1894)가 튜브 내의 소리의 전파와 특히, 정상파 형식(마디와 배)[40]으로 공기나 다른 기체에서의 음속을 측정하고자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먼지 기법을 개발함으로써 진전이 있었다.

 

  그동안 아주 어려운 3차원 액체매질에서의 압축파의 전파 문제를 포아송[59]이 해결하여 1820년 논문으로 공표하였다. 3년 전에는 그때까지 가장 공들인 장황한 논문에서 튜브내의 소리의 전달과 관 끝이 열린 경우와 닫힌 경우의 유한한 길이의 튜브 안의 정상파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튜브의 열린 끝에서 응축(음파에 의한 부분적인 밀도변화)이 엄밀하게 0이 될 수 없다는 생각과 실제 튜브의 기하학적인 길이보다 공명주파수에 대응하는 파장이 좀 더 길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본 후에 관구보정의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는 1860년에 이들 전체문제를 빈틈없이 완전하게 다룬 헬름홀츠를 떠올리게 한다. 특별한 경우로서 튜브의 단면적이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의 경계면과 서로 다른 두 액체의 경계면으로 수직 입사하는 음파의 반사와 투과문제도 포아송이 연구하였다. 많은 실용적인 의미의 현대적인 연구가 포아송의 위대한 논문에서 선행되었다.

 

  좀 더 어려운 문제인 서로 다른 두 액체의 경계면으로 비스듬히 입사하는 평면파 음의 반사와 투과 문제는 독학한 노팅햄의 천재인 그린(George Green: 1793-1841)이 1838년에 해결했다. 그의 논문은 특히 소리의 굴절에 대해 강조하고 있고, 빛과 소리의 반사와 굴절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이상유체속의 음파는 엄밀하게 압축될 것이고 종파인데 반하여 빛은 횡파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광파는 편광될 수 있고 반면에 유체 속에서 음파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렇지 못하다. 이와는 반대로 큰 고체에서 탄성파는 종파와 횡파로 전파할 수 있고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비회전적이고 균등하다. 이런 사실은 포아송이 등방성 탄성매질[58]에 대한 1829년 연구에서 알아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사실이 19세기 중반에 활발하게 연구된 빛의 탄성고체이론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음향학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초기 연구는 어쨌든 20세기 중반에 와서 비행기 동체나 우주선 같은 구조의 탄성파 전파에 대한 관심 때문에 새롭고 엄청나게 중요한 연구로 부상했다. 현대 지구물리학(지진파)과의 관련성을 봐도 그 중요성은 또한 명백하다.

 

  지금까지 소리의 전파에 관한 역사적 조망에서 소리의 전파 때 매질의 교란(초과 밀도 또는 유체의 압력)은 평형 때의 값에 비교할 때 아주 작다고 암묵적인 가정을 해 왔다. 이 경우에 파동 전파에 대한 방정식은 선형적이 된다. 이는 18세기 음향학 연구자들이 그들의 모든 관심을 기울인 방정식 형태이다. 이 방정식에 대한 해는 비교적 큰 교란이 일어나는 실제 소리 전달에 대한 근사 값만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19 세기에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오일러는 소위 유한진폭 파동방정식[20]에 이미 근접했다. 오일러는 그의 유명한 1759년 논문 ‘소리의 전파에 관하여’에서 양쪽에서 압력의 힘을 받는 얇은 공기층의 운동방정식을 계산하였다. 그가 19세기의 정확한 연구결과를 얻었더라면 그는 말도 안 되는 대수적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그의 물리학은 흠 없이 완전했지만 수학은 길을 잃었다. 호머(Homer) 마저도 수긍할 일이다. 여하튼 그는 시간과 공간좌표 각각에 대한 파동변위함수의 2차 도함수만을 갖는 전형적인 선형 파동방정식은 변위의 변화율이 감지할 정도의 양일 경우에는 언제나 비선형 항을 포함시켜 보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비선형 음향파 전파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쯤에 비선형문제를 다룬 학자로는 독일인 수학자 리이만(Georg F. B. Riemann: 1826-1866)과 영국인 수학자 겸 물리학자 이언쇼우(S. Earnshaw: 1805-1888)로서 다소간 독립적으로 특별한 경우[19,16]를 탐구했다. 특히, 비선형 전파의 경우 전파속도가 진폭에 의존하는 결과가 나타나서 영구적인 타입의 비선형 파동의 구현은 아주 특별한 조건인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앞서 포아송(56)이 이해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모든 비선형연구는 스토크(G. G. Stokes), 찰리(J. Challis), 랜킨(W. J. M. Rankine), 유고니오(H. Hugoniot)와 레일리 경(Lord Rayleigh) 과 다른 사람들[13,p438]에 의해 충격파 이론의 진전을 이끌었다. 비선형 음향학은 20세기에 와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III. RECEPTION OF SOUND

 

  음향학 이야기에서 가장 최근까지, 흥미롭고 중요한 소리의 수음기는 인간의 귀이다. 그리고 소리의 인지는 오랫동안 이 기관의 작동과 연관해서 방대하게 연구되었다. 이 점에서 인간의 귀는 음향학의 발전에 인간의 말 보다 더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귀는 현저하게 기능이 다양하고 예민하다. 확인된 인간 청각의 음세기의 문턱 값(임계값)은 10⁻¹⁶W/cm² 또는 10⁻⁹erg/cm²sec 이다. 만일 누군가의 고막면적이 보통크기인 0.66cm²라면 평균 역학적 에너지가 6.6x10⁻¹⁰erg/sec만 고막으로 들어와도 소리를 감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가청주파수 영역의 조화 음은 0.1sec 동안에 확인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음향에너지가 6.6x10⁻¹¹erg이면 귀로 소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에너지로 충분하다. 에너지적으로는 귀도 눈처럼 예민하다는 것이 충분히 밝혀졌다.

 

  귀의 해부학적인 수많은 공들인 연구가 지난 한 세기 정도에 걸쳐서 행해졌는데 특히, 음향적인 반응에 집중적으로 연구 되었다. 어쨌든 이들 모든 연구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수용할 만한 청각 이론은 출현하지 않았다. 어떻게 듣는가하는 어려운 문제는 현대 정신물리학 속에 아직까지 남겨져있다.

 

  음정과 주파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이 후에는 가청 주파수영역을 결정하는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인 물리학자 사바르(F. Savart: 1791-1841)는 1830년경에 팬과 회전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최소 가청 주파수가 8vibrations/sec이고, 최고 가청주파수는 24000vibrations/sec [65]임을 선정했다.(최근에 보통 사용하는 cycles per sec나 Hertz는 유명한 독일 물리학자인 헤르츠(Heinrich Hertz) 이 후에 사용하게 되었다. 헤르츠는 전자기파를 획기적인 방법으로 처음 만들었다) 지벡(L. F. W. A. Seebeck: 1805-1849)(열전효과의 발견자와 혼동하지 말 것), 비오(J. B. Biot: 1774-1802), 케니그(K. R. Koenig: 1832-1901)와 헬름홀츠(앞에서 언급된) 등이 구한 저음가청한계[39, 63, 76]는 16~32cps 이었다. 이는 개인차가 청력에 미치는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고음 가청한계는 더 심하다. 후자는 개인과 개인 간의 차이가 심할 뿐 아니라 각 개인 조차도 보통 나이에 따라 감소한다. 물론, 측정값들은 각 경우 세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교적 최근에 와서 명확히 밝혀진 것이다. 청취력에 대한 가장 공들인 연구는 19세기에 케니그(Koenig)[38]에 의한 것으로, 그는 소리굽쇠, 막대, 현, 파이프와 같은 주파수 조절이 가능한 정밀한 음원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에 헌신했다. 이때는 전자음향적인 음원 시대 이전이었다. 전기적으로 구동하는 소리굽쇠를 만든 것도 케니그 이었다.

 

  밀접한 문제인 청취력에 필요한 최소 음세기에 대한 연구는 겉보기에 토플러((A. Toepler: 1836-1912)와 볼쯔만(L. Boltzmann: 1841-1906)의 1870년의 공동 연구로 보인다. 빛의 간섭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보통 들리는 소리의 밀도의 최대변화(또는 효과적인 최대 압축)를 측정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실험으로 이끌어낸 가청음의 최소세기는 10⁻¹¹W/cm²로서 현대적 방법으로 측정한 값[69]보다 크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간 귀의 대단한 예민함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비엔나의 대단한 이론 물리학자 토플러와 기체 통계이론의 창시자중의 한사람이면서 명성이 자자한 볼쯔만이 음향연구에 서로 협력한 사실은 흥미롭다.

 

  1843년에 옴(Georg Simon Ohm: 1787-1854)은 전류에 대한 법칙으로 유명한 학자로서 청각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음악적인 음정은 어떤 특정한 주파수의 단순 조화진동으로부터 발생하며, 특별한 음질 또는 실제 음악음의 음색은 상응하는 주파수의 단순음들의 조합[54]으로 만들어 진다. 그는 더하여 인간의 귀는 복잡한 어떠한 음일지라도 단순 조화음의 집합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퓨리에(Fourier) 정리에 따라 수학적으로 전개된 관점으로 설명된다. 이 정리는 182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여기서 논의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떤 특정한 수학적인 제한이 있는 이 정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변수 t 즉, 시간변수의 임의함수는 기본주파수의 정수배인 항을 갖는 일종의 삼각함수의 수렴급수로 전개할 수 있다. 만일 시간에 대한 임의함수가 자체적으로 주기함수이면 변수 t의 모든 값에 대해 이같이 수렴급수 형태로 표현할 수 있고, 만일 주기함수가 아닌 경우는 유한시간 구간에 대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 이 정리는 소위 모든 종류의 소리를 분석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옴 (Ohm)의 법칙은 생리학적 및 심리적 음향, 즉 청각의 음향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많은 연구를 자극했다. 19세기에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연구는 의심할 바 없이 헬름홀츠의 ‘Die Lehre von den Tonempfindungen 민 physiologische für die Theorie der Musik'[75]이다. 이 논문은 1895년에 엘리스(a. J. Ellis)에 의해 영어로 ’Sensations of Tone(소리의 감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논문에서 헬름홀츠는 귀의 구조에 대한 정교한 이론, 소위 공진이론으로 달팽이관 안에 있는 바실라막(기저막)의 다양한 요소들이 귀속으로 들어온 소리의 어떤 주파수들에 의해 공진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해 헬름홀츠는 옴의 법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헬름홀츠는 역학적인 공명현상에 대해 대단히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진 특이한 소리 공명기를 고안하였다. 이는 구멍을 갖는 단순한 구형 통이다. 적절한 주파수의 조화음원을 구멍에 가까이 가져갈 때, 통의 크기와 구멍의 크기가 딱 맞아 떨어지면 구멍 안 공기의 활발한 진동운동에 의해서 소리가 크게 증폭된다. 큰 통은 저주파 또는 낮은 음정의 소리와 공명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 이 공명기는 현대의 음향연구와 응용에 폭 넓게 이용되고 있다. 헬름홀츠는 주파수가 다른 두 소리가 비대칭적인 진동자로 들어오면, 결과적인 진동에는 원래 소리의 주파수의 차이와 합의 주파수가 나타나며, 원래 주파수의 많은 선형적인 조합의 주파수 진동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의 고막이 비대칭 진동자이므로 소리의 합과 차이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예측은 확인 되었다. 헬름홀츠의 선구적 연구는 청각분야의 모든 후발연구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 19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천재성으로 그가 손을 댄 분야 중에 풍부해지지 않은 분야는 없었다.

 

  실내, 교회, 극장, 강당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의 생활을 하면서 귀로 소리를 인지하기 때문에 나중에 실내음향학 또는 건축음향학이라고 부르게 되는 분야에 대한 발전에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야하는 당위성이 생긴다. 일찍이 몇 몇 방들은 소리를 듣기에 만족스럽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도구가 이용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기하적인 장치로써 소리판이나 반사판 같은 것들이다. 보스톤의 물리학자인 업햄(J. B. Upham)[73]은 1853년에 이름하여 잔향시간 또는 방의 사방 벽으로부터 다중 반사하는 소리를 포함한 중요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짚은 몇 개의 논문을 썼다. 그는 또한, 커튼을 장치하거나 천을 씌운 가구가 어떻게 잔향시간을 감소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협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헨리(Joseph Henry:1797-1878)는 1856년에 그의 제안이 비록 모두 질적인 특성이기는 했지만 관련된 모든 요소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반영한 강당 음향학 연구[31]를 진행했다. 초반의 이들 연구가 오늘날에 보아도 그 방향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링 와이어와 같은 부적절한 장치로 실내의 전반적인 음향 결함을 교정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19세기 후반부에 걸쳐 건축학자들에게는 완전히 무시당했다. 현대적인 건축음향학의 양적 기초자료는 하버드 대학교의 물리학자 사빈(Wallace C. Sabine: 1868-1919)에 의해 구해졌다. 사빈은 1900년에 실내의 잔향시간(즉, 처음에 실내에 형성된 소리의 세기가 백만분의 일의 크기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실내공간의 부피와 실내 음향흡음물질의 총합으로 설명하는 법칙[62]을 만들었다. 이 법칙이 응용건축음향학이 비록, 문제가 될 수 있는 미묘한 심리적 요소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연설을 청취하거나 음악연주를 만족스럽게 하기위한 실내 디자인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의 가능성을 만들었다.

 

  귀로 듣는 소리를 크게 하는 특별한 도구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혼(horn)은 명백히 아주 오래된 도구이다. 혼이 소리의 수신을 향상 시키는데 사용된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수회 수사였던 키르쳐(Athanasius Kircher)는 1650년에 메가폰처럼 보청기로 설계된 쌍곡선 혼을 언급[35]하고 있으며, 소리를 수신증폭하거나 방사증폭할 때 혼의 플레어(flare)가 중요함을 명백히 인식했다. 후크(Robert Hooke)는 영국왕립학회에 대한 직책에 관련하여 평생 새로운 아이디어를 엄밀하게 실험해 보았는데, 이어트럼펫(ear trumpets)을 실험하고 신체의 소리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는 도구를 제안[30]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물리학자 라엥닉(Renè Laënec: 1781-1826)이 먼저 연구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그는 임상목적(시행:1817~1819년)으로 청진기를 발명하고 사용하였다. 영국의 물리학자 휘트스톤(Sir Charles Wheatstone: 1802-1875)는 스스로 이름붙인 청진기와 유사한 마이크로폰[78]이라는 이름의 도구 즉, 소리의 수신기로써 현대의 전기역학에 응용하는 기구((즉, 소리에 의해 발생한 운동이 전기적 흐름을 유도하는 기구)를 1827년에 개발했다. 전기음향학 없이 현대 실험 음향학은 존재할 수가 없는 지경임에도, 당시에는 전기음향학을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물리학의 역사적 발전을 통틀어 살펴보면, 물리적 현상을 눈으로 관측하고 특히 어떤 실험적 측정을 볼 수 있는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을 간파할 수 있다. 모든 물리적 측정은 이런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측정도구는 눈금위에 지시 바늘이나 광점이 움직이도록 만든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이런 시도들이 음향현상연구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특히, 가청주파수 이상의 주파수 음 즉, 소위 초음파에 대한 연구에는 더 필요한 것이다. 이 방향으로의 최초의 움직임중의 하나는 미국 물리학자 르꽁떼(John LeConte: 1818-1891)에 의한 관측으로써 압력만 적절하다면 음악소리에 맞는 가스불꽃의 흔들림을 만들 수 있음[45]을 1858년에 보인 것이다. 나중에 이름이 붙여진 이 민감한 불꽃은 영국의 물리학자 틴달(John Tyndall: 1820-1893)에 의해 우수한 고음용으로 개선되었다. 틴달은 민감한 불꽃을 이용하여 고주파수 음(비가청음)을 탐지하고, 소리의 반사, 굴절, 소리의 회절[71,72]을 연구하였다. 민감한 불꽃은 아직도 효과적인 강의도구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20세기가 되면서 음극선관 오실로스코프와 연결해서 사용하는 다양한 전기마이크로폰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음파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력은 1860년에 케니그(Koenig)[37]가 가스가 버너로 흐르도록 하는 상자로 구성된 압력계가 설치된 불꽃 장치를 발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상자의 한쪽 면에는 유연한 막이 있다. 소리가 이 막을 때리면 압력변화를 일으키고 압력변화는 불꽃의 오르내림의 변동을 만들어냄으로써 빠르게 회전하는 거울에 의한 불꽃 빛의 반사를 통하여 불꽃의 변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음파 가시장치는 19세기 프랑스의 교정 및 편집자이면서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스콧(Edouard-Leon Scott de Martinville)에 의해서 1857년에 시도되었다. 그는 수신용 혼의 목 부분에 유연한 막을 붙이고 바늘을 붙인 후, 바늘의 다른 쪽 끝이 끄으름을 묻힌 회전원통에 닿아 수신 혼으로 입사한 소리의 주파수에 대응한 선이 그려지도록 했다[17]. 이 ‘phonautograph'는 ’phonograph(축음기)'의 전신이었다. 이와 같은 선상에 놓인 야심찬 시도가 미국 브라운대학교 물리학과의 최초의 해저드 교수였던 블레이크(Eli Whitney Blake[4]: 1836-1895)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는 1878년에 전화기의 송화구 뒤쪽의 진동 원판에 작은 금속 거울을 붙여 일종의 마이크로폰을 만들었다. 거울로부터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블레이크는 인간의 말소리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는 미국인 물리학자인 밀러(D. C. Miller: 1866-1941)에 의해 많은 진전이 있었다. 밀러는 ‘phonodeik'이라는 유사한 장치를 발명하고, 음파 형태에 대한 매우 정교한 사진[52]을 만들었다. 스콧과 블레이크, 밀러의 이들 다양한 장치는 물론, 현대 음향학 연구에 매우 유용한 음극선관 오실로스코프의의 전신이었다.

 

 

   IV. LORD RAYLEIGH AND MODERN ACOUSTICS

 

  1877년에 레일리경이 출판한 ‘Theory of Sound[67](소리의 이론)'은 고전음향학 시대의 마감이요, 현대음향학 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지표가 된다. 레일리는 19세기 중반케임브리지대학 수학학교 출신이며, 1865년도 수학 트리포스(Tripos)를 수석 랭글러(Wrangler)로 졸업했다. 그러므로 헬름홀츠의 논문 ’Sensations of Tone[75,76]'을 읽으면서 분석적으로 문제를 다룰 준비가 잘 되어있었다. 이 논문은 그로 하여금 알고 있는 협회 저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음향학 전체 분야의 여러 논문들을 한 곳에 모아 내용이 풍부하고, 권위 있는 논문을 쓰고자하는 바람직한 생각을 품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논문을 자세하게 발표 할 기회를 가졌다. 그 논문은 물리학적 문헌의 기념비적 업적이 되었으며, 나중의 음향과학 특히 분석적 측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낳았다.

레일리의 연구 작업은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앞부분은 현의 진동, 막대, 막과 평판의 진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역학적 진동현상과 관련이 있다. 이 같은 구조물의 운동은 물론 소리의 발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논문의 중요한 특징은 일반 원칙의 수립과 실용적인 의미의 특별한 경우에 대한 적용에 대한 주장이다. 레일리는 원숙한 응용수학자로서 어려운 진동 문제의 해를 구하는 도움이 될 만한 기법을 개발했다. 이들 중에 하나는 소위 Rayleigh-Ritz 방법으로써 현대에 와서 널리 응용되고 있으되, 고체 구조물의 진동연구뿐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에도 사용된다. 레일리는 결코 자연현상에 내재하는 물리적 의미의 관점을 잃지 않았으며,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언제나 분석하였다.

 

  레일리의 ‘sound'의 두 번째 부분은 유체매질을 통해 전파하는 소리를 원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는 어려운 문제, 예를 들어 물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음파의 회절, 물속의 공기방울과 같은 입자가 떠 있는 매질을 지날 때 일반적으로 흩어지는 소리의 산란 같은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다. 음향적인 회절과 산란의 수학적 형태는 빛에 대한 회절과 산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가청음의 보통 파장이 장애물의 크기보다 몇 배나 더 크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진동하는 물체 즉, 진동하는 구나 진동하는 원판과 같이 음향 ’빔(beams)'을 발생하는 음향방사의 기하학적 특성에도 많은 집중을 기울였다. 레일리는 이런 종류의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으며,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에 나온 두 번째 ‘Theory of Sound[67]'의 확장, 개정판에서 앞선 연구자들의, 다양한 소산방식으로 나타나는 유체 내 소리의 감쇠와 같은, 연구결과를 완벽하고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물리학의 한 분야로써의 음향학, 지금 보아도 완벽하고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는 음향학의 모든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장(場, 界, field)개념의 음향학적 미래는 엔지니어의 손에 달렸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사실 장 개념은 전기공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과학적 노력을 기울인 앙페르(Ampere),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에 의해서 발전한 전기학과 자기학의 기초이론에서 그 유용성이 이미 입증되었다. 음향학을 장 개념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당시에 어느 정도 있기는 했으나 사실 그다지 많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음향현상을 연구할 흥미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고, 흥미가 있더라도 이들 장 개념의 연구를 바탕으로 실제 수행할 수 있는 실험적인 결과를 이용 가능한 입지가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일리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는 관심 있는 주제가 가청영역을 넘는 주파수를 갖는 음파와 관련될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러나 레일리의 ’Sound'가 출판된 당시에는 그와 같은 음파를 발생하는 실제 음원이 오로지 새 호루라기(bird whistle) 뿐이었다.

 

  19세기의 물리학을 되돌아보면 넓은 주파수 영역을 갖는 음원을 사용하되 전기적인 기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믿기지 않는다. 주된 어려움은 물론, 고체 진동자와 같이 잘 맞는 전기진동을 만드는 방법상 역량이 부족한데 있었다. 압전효과가 1880년에 피에르와 자크 퀴리(Curie)[15] 형제에 의해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압전효과는 적당하게 자른 수정결정의 양 반대편에 양전기와 음전기를 교대로 인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정결정을 진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압전효과의 성공적인 활용은 음원이나 수음기로 이용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20세기의 초반 20여년애 플레밍(Fleming)과 드 포레스트(DeForest)가 각각 진공관식 진동자와 증폭기를 발명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사실상, 20세기의 초반에는 풀리지 않은 많은 음향학적인 기초 문제가 있었다.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청각 특성은 전체적으로 결코 이해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귀의 해부학적 구조와 한편으로 연관된 신경시스템, 관측된 청각특성들 사이의 관계가 결코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아직 음성 분석의 부적절한 수단 때문에 실용적이지 못하다. 물리적 측면에서, 전달 특성인 점성 및 열전도 효과의 관점에서 대기와 같은 유체에서의 소리의 감쇠에 대한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효과로 예측되는 결과는 실험값과 일치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적절하게 관측한 값보다 크게 작은 값으로 예측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현상은 사실 레일리경이 인지한 것으로 그는 소위 이완효과(relaxation effects)라는 어려운 용어의 그럴듯한 해법인 기발한 착상을 했다. 이 효과는 20세기의 4분기가 될 때까지 충분히 탐구되지 못했다[66].

 

  이미 암시 되었듯이, 아마도 1900 년경과 그 이후 몇 년 동안 과학과 기술의 한 부분으로서의 음향학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음 수신기 또는 변환기와 적절한 음원의 부족이었다. 대단하고 많은 물리적 현상 즉, 역학적, 열적, 전기적, 자기적인 현상들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소리를 발생시키고 역으로 소리를 다른 물리적인 형태로 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전환 또는 변환이 엄청나게 실용적으로 중요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의 확실한 예가 전화기로써 전화기에 의해 소리를 자체적으로 매질을 전파할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감쇠 없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제는 1876년경에 벨(Alexander Graham Bell)에 의해 처음으로 해결(오랜 특허소송 후에 미합중국 법정의 결정에 따라서)되었다. 이 경우의 변환구조는 물론, 전자기적 특성을 이용한다. 이 발명이 미래의 음향학 발전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전화기를 개선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인간 통신의 모든 측면에 대한 연구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벨전화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의 연구결과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인간이 듣고 말하는 방식에 대하여 인간의 단순한 호기심으로부터 합리적으로 예상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1초에 수 번 진동하는 소리에서 수십억 번 진동하는 주파수의 소리까지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런 소리에 노출된 고체, 액체, 기체 매질의 작용을 효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동시에 고주파수 방사 즉, 지금 부르는 이름으로는 초음파와 전기, 자기, 고온 및 저온, 넓은 영역의 압력과 같은 다른 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체적으로 과학의 발전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음향학의 진보를 간단한 설명으로 공정하게 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반인에게는 순수과학의 범주보다는 기술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발전을 느낄 것이다. 라디오, 영화 및 TV에서 음향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여기에는 유형 레코더는 말할 것도 없고 소리녹음 및 재생, 축음기 디스크 및 하이파이 세트 제작과 같은 전체 영역이 추가 되어야만 한다. 확성장치와 소리를 증폭시키는 다른 장치들이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연설자의 목소리까지도 대규모의 군중에게 들려준다. 국가기밀이라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는 잠수함이나 다른 물체를 찾기 위해 수중으로 소리를 보낼 수 있도록 설계된 변환기가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 분야에서 순수음향학과 응용음향학 사이의 상호협력이 사실상 특별히 명백하다. 수중변환기의 출력, 감도, 효율이 증대되면서 정교한 수중변환기의 사용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바닷물의 음향적 특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음향연구의 새로운 분야가 물리적 해양학의 한 분야로써 생겨났다. 유사한 방식으로 말과 청각을 연구하기 위해 개선된 계측기가 생리학과 심리학의 전혀 새로운 분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고출력 초음파 변환기의 구성은 진료와 치료용 의료연구를 위한 새로운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소리의 발생과 증폭의 현대적 방법에 의해서 음악마저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종류의 목록은 소리와 관계된 모든 형태의 인간 활동영역으로 확장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다.

 

  어째든 기초음향학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들 중에 특별히 초음파와 물질과의 다양한 양상의 상호작용이 있다.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초음파의 실제 한계주파수를 확장할 수 있는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현재(1966년)의 초음파 주파수 한계는 대략 10¹⁰ Hz 이다. 만일 10¹¹~10¹⁴Hz의 초음파를 발생시킬 수 있다면 고체, 액체, 기체상태 물질의 성질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진시킬 것이다. 초음파를 광학적인 레이저를 이용하는 최근의 연구는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상세한 내용을 다루는 곳이 아니다. 상세한 내용은 미국음향협회 논문집이나 참고 문헌[1,34]을 보면 된다.

 

  사실, 지난 1/3세기 동안의 음향학에 대한 전체 역사는 논문집의 논문이나 인용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필자는 본 리뷰에서 모아진 논문들의 원전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미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오일러를 연구한 트뤠스델의 역사적인 참고문헌[70]과 마찬가지로 밀러(D. C. Miller)의 ‘Anecdotal History of the Science of Sound[51](소리과학의 일화적 역사)'와 헌트(F. V. Hunt)의 'Electroacoustics[33](전기음향학)'에 각별히 감사하며 은혜를 입었다. 저자는 인용문헌을 제공하고, 문헌에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준 브라운대학교 물리과학도서관 직원들과 특히, 쿨리지(Antigone C. Coolidge)에게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고에너지 물리나 고체 특성의 매력에 빠진 몇몇 물리학자들은 음향학과 같은 소위 물리학의 ‘고전’분야는 앞으로 기술적인 응용분야에 놓일 뿐 물리과학으로부터는 ‘배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반세기 동안의 과학의 역사가 충분히 보여준 것과 앞 절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는 틀린 생각이다. 인간이 핵에 관한 질문과 핵 속에 있거나 핵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론적인 입자에 대해 질문을 할 때보다 음향에 관한 질문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추론할 근거는 따로 없다. 물론,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자연 현상과 인류가 편리함을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정립시킨 이론 사이의 경계선이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래과학의 목적은 의미 있는 통합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향학은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주장할 것이다.

 

 

   번역 후기  ----  Dajaehun

 

 본 'The Story of Acoustics'는 1966년도에 쓰인 글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현대라는 말은 1960년대를 가리키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어째든 역사는 나중에 기록된다고 그 이전 내용이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Lindsay의 글이 50년 전에 씌여졌지만 그리스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물리음향학의 역사로는 잘 요약된 글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기음향기술의 발달로 통신과 오디오분야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고,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음성인식과 합성, 전자악기의 탄생, 소리의 분석 및 측정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초음파분야도 신호처리 기술덕분에 영상진단의료장비, 출력 파워의 향상으로 치료용 기기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초음파응용기술이 산업전반에 고루 사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학문적으로는 고체진동분야가 진동공학으로 분류되고, 실생활의 소리를 제어하는 소음공학 또, 건축음향학, 음악음향학, 심리음향학 등이 음향학으로부터 파생됐다. 물리음향학의 분야는 1960년대 이 후에 본문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비선형음향학이 20세기 후반부에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초음파를 이용한 물질분석, 메타구조에서의 음전달 등 등이 연구되고 있다.

 Lindsay(1900-1985)의 글이 만연체라서 번역이 힘들었다. 5월 13일에 시작하여 7월 5일인 오늘에야 끝났다. 문장 교정도 보지 않은 채 먼저 글을 올리고, 틈나는 대로 번역한 것처럼 틈나는 대로 교정은 볼 생각이다. 아무튼 물리음향학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by  Dajae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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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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