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의 유래

상상우화 2011. 10. 11. 22:08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유적은 고인돌이다. 세계적으로 8만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중의 반인 4만기가 한반도에 남아 있다. 고인돌은 제단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지석묘로 알려진 바와 같이 무덤일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것도 지배층의 무덤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아프리카의 고인돌은 기원전 5000년, 유럽은 기원전 3000년, 동아시아 지역은 기원전 2000년 전 경부터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 내지 200년경부터 고인돌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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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에서 확장되기 시작한 고인돌 문화인들은 소아시아를 거쳐 동유럽,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지역을 지나 현재의 몽고를 거쳐 한반도로 남하하는데 3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한 세대를 25년 주기로 볼 때, 120세대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동할 때 앞장선 무리가 쉬지 않고 맨 앞에서 이동을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지배층은 청동금속 도구를 사용하고, 일반인들은 석기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돌 도구를 사용해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앞서간 무리가 터전을 잡고, 뒤에서 먼저 터전을 잡은 무리의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그러면 일단의 무리가 이동을 시작해 앞서간 무리의 정착지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선 정착민이 나중에 유목민으로 정착지를 지나고 다시 정착하고, 뒤에 남은 정착민의 일부가 무리지어 유목민이 되어 앞서간 즉, 전에 자신들의 정착지를 지나간 유목민의 정착지를 지나가는 방식으로 이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이동 집단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각 집단의 규모는 각 집단이 만든 고인돌 덮개석을 끌어다 놓을 수 있는 성인 남자수의 3배 정도의 숫자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래 정착민과 유목민의 충돌은 그 뿌리가 깊다. 유목민은 이동 중에는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사육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정착민의 마을을 습격하여 양식이나 가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한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그 지역을 지나갈 유목민이나 인근의 정착 집단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에게 자기 마을이나 인근의 우호세력의 위용을 느끼게 할 표지가 필요해졌다. 바로 이 필요에 의해 고인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 피라미드도 미리 만든 무덤인 것처럼 고인돌을 만들어 위용을 과시하면서도 우두머리의 무덤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고인돌을 만들 때는 괸돌을 땅을 파고 세운 뒤에 흙으로 묻고, 그 위로 마을 장정들이 덮개석을 끌어다 놓은 후, 괸돌 주변의 흙을 파내서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표지석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해야 함으로 괸돌이 중요하다. 즉, 괸돌은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며, 덮개석은 그 크기로 정착 무리의 규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유목민은 고인돌을 보고 공격할지 아니면 피해서 멀리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했을 것임으로 정착민은 가능하면 크고 무거운 덮개석으로 고인돌을 만들고자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하여튼 고인돌은 인류의 이동시대, 이동경로, 이동시간, 이동규모, 이동속도, 당시의 사회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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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심심풀이로 대하는 유적일지라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며, 어느 면에서는 삶의 전부였을 수 있다. 그러니 그 해석도 진지하게 다양한 접근법으로 해석하고 추론해야 한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고대 유물의 용도나 제작방법을 해석할 때, 한가지의 용도나 방법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시의 유물의 주인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상상력의 열등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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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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