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측하는 문제에서 인과론과 확률론이 대두 된다. 인과론은 원인이 있어 결과가 도출된다는 논리로써 원인은 현재와 과거일 수 있고 결과는 미래이므로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만 잘 파악하면 결과인 미래를 명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갖는다. 결국 인과론은 미래를 예측 가능하다는 입장이고 원인과 결과의 역학적인 구조 파악이 전제되기 때문에 기계론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인과론은 역학에서 시작되었다.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에 의한 정력학과 뉴톤(Isaac Newton 1642~1726)에 의해 정립된 동력학은 초기조건만 알면 시간에 따른 물체의 위치를 명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어떤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론적으로  자연법칙에따라 미래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높은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지던 돌멩이가 나중에 멈추었을 때 그 멈추어진 위치가 우연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 즉, 자연이 부과한 조건에따라 움직이고, 부서지고, 구르고, 방향을 틀어서 그 자리에 놓였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론에 입각한 미래는 외통수 길이며 조건에따라 시간계열적으로 정해지는 어떤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과론은 숙명론을 대변한다.

 

 인과론이 숙명론이란 의미는 과거의 축적으로 현재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역으로는 현재를 통하여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화학자이며 지질학자였던 스코틀랜드의 허튼(James Hutton 1726~1797)의 동일과정설은 표현만 다르지 인과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허튼은 현재의 지질작용으로부터 과거를 읽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The present is a key to the past)'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인과론적으로 작동한다고해서 인과론 자체가 자연법칙이란 의미는 아니다. 인과론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지 객관성을 가진 진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힘과 에너지가 자연변화의 주요 인자라는 뉴톤의 연구가 너무나 황홀하였기 때문에 인과론은 과학,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자연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또,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 되었다.

 

 지금도 인과론은 기상학과 같은 과학분야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기압의 분포에 따라 공기가 이동하여 바람이 불고 이동하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구름이 형성되던가, 비가 오던가, 눈이 내리던가 할 것이다. 다만 변수가 워낙 많아서 슈퍼컴퓨터로 미래의 기상상태를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울 뿐이다. 설령 모든 기상변수들을 모두 단 알고 슈퍼컴퓨터를 돌려 미래를 예측한다고해도 제트기류의 지구회전 주기가 5일이므로 5일 이상은 예측불가하다고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말한 바 있지만, 현재 상태와 기상변화의 역학구조를 정확히 안다면 앞날의 기상상황을 명확히 예측 가능하다라고 믿는 인과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무튼 5일 이내 일지라도 기상상태를 명확히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명확히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1초 후의 미래만 명확히 알아도 주식시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명확한 예측'에 있다. 먼저 '예측'은 인간행위이다. 설령 자연이 인과론적인 변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인간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명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대체 '명확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00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은 매우 명확한 것인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사건은 확실은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앞으로 확실하게 일어날 사건을 빗대어 단순히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틀림없이 미래에 일어날 하나의 사건에 대한 예측이 명확성을 확보하려면 그 사건이 일어날 시점을 좁혀서 정확한 날짜나 시간을 예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시점마저도 명확한 예측에 대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일 수 없다. 명확한 예측을 위해서는 정확한 시점에 더하여 그에 부응하는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자연법칙이 제시되어야 한다. 아니면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자연법칙으로부터 사건과 사건이 일어날 시점을 유도하거나 계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로 인하여 그런 계산을 정확하게 할 수 없다.

 

 미래를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확률적으로 주가나 날씨를 예측한다. 확률적으로 100%는 명확하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 대상의 범주에따라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인과론을 대체하는 자연관이 확률론이다. 확률론이 주장하는 바는 자연은 그 자체로도 인과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미시적인 존재들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갖는 이중성이라는 사실로부터 양자역학이 탄생할 때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는 물질파방정식을 유도해 냈다. 그리고 그 방정식의 해를 구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 해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는 그 입자가 특정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 확률을 의미한다고 보른(Max Born 1882~1970)이 수학적으로 해석하였다. 비록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자신은 이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미시세계의 자연법칙이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쩌겠는가?  

 

 미시세계의 확률론은 거시세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어떻게 한 입자가 여기 저기에 존재확률을 갖고 놓여 있던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미시세계가 그렇게 작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확률론은 입자가 파동방식으로 공간에 분포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는 반대로 파동이라고 생각되던 빛도 입자로 간주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촛불의 불빛이 공간으로 전파할 때 빛을 파동으로 간주하면 5m만 멀어져도 파동이 약해져서 촛불을 볼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10m 거리에서도 촛불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일상적인 현상도 빛을 입자로 간주할 때 설명이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먼 별을 볼 수 있는 것도 별빛을 입자로 간주해야만 설명 가능하다. 따라서 이중성은 소립자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특성이며 이런 소립자의 파동성에 기초한 확률론을 통하여 인간은 미시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거시세계는 미시세계의 물리법칙을 따르는 물질과 규칙 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의 현상이 관측되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확률론을 거부하고 배타적으로 대할 수는 없다. 결국, 거시세계도 미시세계와 같이 확률론에 입각하여 미래를 예측해야 하며 어느 경우든 명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다. 자연은 복합명제에 대하여 명확한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00% 명확한 예측은 있을 수 없다. 또, 99%의 발생확률로 사건이 예측될지라도 1%의 변수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예측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아쉽게도 확률론은 실존적인 인간한계가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인간은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명확한 예측의 확률을 높임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위협사건에 대비해야하며, 인류의 꿈과 희망의 구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by  Dajaehun  

    

                                                     [Probability distributions of an electron in an atom]

        

 

 

 

'다재헌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이유-단상(88)  (0) 2018.01.23
나는 어디에 있나-단상(87)  (0) 2018.01.12
주일의 게으름 - 단상(85)  (0) 2017.09.27
어떻게(How)와 왜(Why) - 단상(84)  (0) 2017.09.25
식물의 뿌리- 단상(83)  (0) 2017.08.09
Posted by 다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