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창의성이 넘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왜(Why)'라는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육한다. 호기심의 발로가 ‘왜’로 표출된다는 주장이다. ‘왜’는 언제나 이유와 원인을 찾는 화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들의 행동이나 행태에 대해서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그 동물의 행동의 이유를 찾고,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사람의 의식작용이다. 거미는 왜 거미줄을 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날아다니는 곤충을 잡기 위함이다. 즉, 답이 곧 이유이다. 사슴이 풀을 뜯다가 도망을 친다면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 때문이다. 사슴 행동의 원인은 호랑이다.

 그러나 거미줄에 대하여 ‘어떻게(How)'라고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거미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문제로 전환된다. 거미줄의 모양과 만드는 방법이 거미의 종류마다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꽁지로 거미줄을 뿜어낸다는 사실뿐이고 뿜어내는 거미줄의 질조차 모두 다르다. 아무튼 동물의 행동에 대한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은 인간입장에서 볼 때 양자가 모두 가능한 질문이다. 동물의 행동에 대한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은 결국 동물의 환경에 대한 반응에 대한 질문이고 그 답이 이유, 원인 및 방법이 된다.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왜’ 거기 서있는가? 씨앗이 그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서있는가? 하늘을 향해 줄기로 서있다. 이 또 한 이유와 방법에 관한 사항으로써 식물의 환경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존재론으로 살펴보면 ‘어떻게’는 양태적이므로 쉽게 묘사되는 답을 낼 수가 있지만 ‘왜’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는 선뜻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거미가 있다. 즉, 거미가 존재한다.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거미의 모습을 묘사하면 된다. 그러나 ‘왜’ 거미가 존재하는가? 라는 궁극적인 존재론적인 질문에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답은 종교적이고 선택적이며 주관적이다. 생물의 존재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영역은 신의 영역이 된다.

 무생물적인 자연에 대한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도 서로의 영역이 확연히 구별된다. 바위가 있다. '왜' 바위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존재론적이라서 답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어떻게’ 바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위의 모양을 말할 수도 있고 바위를 구성하는 규소, 산소, 철, 알루미늄 등등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또, 바위가 단단한 흙 위에 놓여 있다고 답할 수도 있다. 만약 바위가 낭떠러지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다면 '어떻게'란 질문은 지구중력에 의한 자유낙하라는 답을 이끌어낼 것이고, '왜'라는 질문은 공기가 항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바위에 왜 중력이 주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자연현상과 같은 현상론적인 질문도 '왜' 보다는 ‘어떻게’가 더 적절한 질문임을 보여준다. 사실 지금까지의 과학도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행위였고 또, 그 답을 찾는 만큼만 과학이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은 가능하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구해지는 경우는 ‘어떻게’란 질문으로 대체 가능한 경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물 표면은 수평하지? 라고 묻는다면 물 분자도 중력을 받고 대기압으로 눌리면서 물 분자끼리는 수소결합을 하되 액체라서 유동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된다. 그러므로 ‘왜’ 물표면은 수평하지? 라는 질문은 ‘어떻게’ 물은 표면을 수평으로 유지하지? 라는 질문으로 교체 가능하다. 다시 ‘왜’ 물은 수소결합을 하지? 라고 질문하면 물 분자는 산소원자 한 개와 수소원자 두 개로 공유결합하여 극성분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된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 반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답을 할 수 있는 ‘왜’라는 질문은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다보면 답이 없는 존재론적인 궁극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즉, ‘어떻게’로 대체 불가한 ‘왜’라는 궁극적인 존재론적인 질문에 봉착한다는 의미이다. ‘왜’ 수소와 산소원자가 자연에 존재하는 거지?

 수소원자는 한 개의 양성자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 형태라고 알려져 있다. ‘왜’ 전자가 양성자 주위를 회전하는가? 그것은 전자와 양성자에 주어진 음전하와 양전하 사이의 전기적 인력이 원심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왜’ 전자가 회전운동을 하는데도 전자기파를 방출하지 않지? Bohr나 Sommerfelt의 양자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이지. ‘’ 양자조건을 만족하면 전자기파를 발생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양성자 주변을 회전하는 것인가? 그건 신이 그렇게 세상을 만들어서 그렇지. 뭐!

 결국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자연현상 모두에 대해서 ‘어떻게’라는 질문이 가능하고, ‘왜’라는 질문이 가능한 경우는 ‘어떻게’로 대체 가능할 경우로 제한되며, 그 경우에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고, 그 답을 찾는 행위가 곧 과학이다. 실제로 ‘왜’라는 궁극적인 존재론적인 질문은 위대한 설계자인 신의 의도에 대한 질문이 되기 때문에 인간 누구도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답을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선택적이고 주관적이며 종교적이고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다.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 by  Dajaehun

 

 

 

 

'다재헌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과론과 확률론-단상(86)  (1) 2018.01.04
주일의 게으름 - 단상(85)  (0) 2017.09.27
식물의 뿌리- 단상(83)  (0) 2017.08.09
나무(1)-단상(81)  (0) 2017.01.04
3음절 사투리 및 추억의 단어-단상(80)  (0) 2016.11.25
Posted by 다재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