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국제 표준화가 한국주도로 공인되고, 배추에서 항암제가 발견됐다하여 떠들석하다. 태극기 보다 김치가 더 한국의 상징이 된 듯하다. 고구려 시대부터 김치가 있었다하니 그럴 만도 하다.

  각 민족의 주된 음식은 주로 저장법에 따라 특징을 갖는다. 서양의 훈제나 건조 및 치즈 같은 발효식품, 인도의 카레, 중국의 기름에 튀기는 음식류, 일본의 초밥 등이 그러하다. 그중에 한국은 김치류나 장류, 젓갈류 처럼 발효식품이 특히 발달했다.

  그런데 모든 사실에 과거는 있으나 역사는 있거나 없거나하기 때문에 그 유래를 일일이 알 수가 없다. 고추의 유래가 그러하다. 16세기 말, 임진란 때 들어왔다고 한다거나 그 이전부터 있다는 주장이 상충한다. 그러므로 언제부터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기 시작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 근거 있는 상상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고춧가루는 산패를 방지하기 위해 김치에 넣는 것이다. 고추가 없던 시절에는 산초를 김치에 넣어 산패를 방지했다고 전해져 온다. 어찌됐던 초기의 고춧가루는 돈 없는 서민이 소주한잔에 취기를 느끼기 위해 소주에 타먹는 용도로 사용됐었다.  이런 이유로 고추는 주막집 텃밭에서 생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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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에 인접한 충청도 괴산의 한 마을에 한량이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이름은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한량이라 불렀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잊은지 오래된 터였다. 지주인 부모를 둔 덕에 대낮부터 술 마시는 일이 특기라면 특기인 인물이었다.

  어느 햇살 따가운 가을날, 남들은 추수하느라 바쁜 날이었으나 한량은 주막에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모는 마당에서 산초 김치를 버무려 담그려고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썰어 주둥이가 넓은 질그릇 통인 판애기에 담는 중이었다.

  이때 그 날따라 과음을 한 한량이 집에 가려고 짚신을 신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뜨랑에 놓인 광주리를 걷어차는 사건이 벌어졌다. 흰 천이 깔린 광주리에는 절구로 곱게 빻은 고춧가루가 담겨 있었다. 늦가을에 빨간 고춧가루를 잘 건조시켜 두는 일이 주모에게는 매우 중요한 연례 행사였다. 일 년치를 준비하되 얼마나 고춧가루를 곱게 빻느냐가 주모의 능력으로 평가 받던 시절이었다.

  하여튼 한량은 이날 본의 아니게 주모의 일 년 농사를 망치게 됐다. 더욱이 한량이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걷어찬 광주리는 공중으로 날아 배추가 담긴 판애기로 엎어지면서 떨어졌다. 고춧가루가 배추와 범벅이 되었다. 주모의 바가지가 개짓는 소리보다 더 크게 울타리를 넘었다. 한참을 소리 지르던 주모가 정신을 차리고 고춧가루를 씻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현대 과학의 이론을 빌려 설명하자면, 가루가 된 고추는 체적 대비 표면적이 큰 바람에 진드기처럼 배추에 흡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모는 씻기를 포기하고 산초를 넣고 버무렸다.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에이! 고춧가루 소주도 마시는데 배추에 묻은 고춧가루를 먹는다고 죽지는 않을겨~씨~.”

  그런데 며칠 후 김치를 살펴보니 산초김치처럼 심하게 곯지를 않고 오히려 더 향긋했으며, 먹어보니 맛도 더  좋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주모는 김치를 만들 때마다 고추가루를 넣게 되었다. 참으로 우연히 찾아온 대 사건이었다.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어진 김치에 대한 소문은 매스 미디어가 없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느린듯 빠르게 조선 팔도로 번져갔다. 고추 재배도 늘어났고, 그 후로 장이나 찌개 등 등 여러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어보는 시도가 줄을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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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량은 술을 마시면서 삶의 의미를 평생 고뇌했으나 해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다만 취중의 발길질이 조선, 나아가 세계를 걷어찬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나 남들이 동시대를 살면서 어떤 엄청난 영향력을 서로에게 끼치는지를 눈치 채지 못한 채 한 생을 산다.

   ------------------ by  Dajae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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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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